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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애니메이션

[영화리뷰]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 1980 버블경제 시대를 여전히 살아가는 2020 일본인들에게 들이미는 칼날

[줄거리]

혈귀로 변해버린 여동생 ‘네즈코’를 인간으로 되돌릴 단서를 찾아 비밀조직 귀살대에 들어간 ‘탄지로.’
‘젠이츠’, ‘이노스케’와 새로운 임무 수행을 위해 무한열차에 탑승 후
귀살대 최강 검사 염주 ‘렌고쿠’와 합류한다.
 
달리는 무한열차에서 승객들이 하나 둘 흔적 없이 사라지자
숨어있는 식인 혈귀의 존재를 직감하는 ‘렌고쿠’.
 
귀살대 ‘탄지로’ 일행과 최강 검사 염주 ‘렌고쿠’는
어둠 속을 달리는 무한열차에서 모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예측불가능한 능력을 가진 혈귀와 목숨을 건 혈전을 시작하는데…

역대 영화 흥행 순위 - 일본

<스포일러성 리뷰>

현재, 역대 일본 최고 흥행 영화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다.

정말 재밌다. 끝내준다. 이동진 평론가님 말씀대로 갈아만든 액션이다.

 

그런데, "갈아만든 액션"만으로는 설명이 안될 성적이다.

일본이 이 애니메이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득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은 일본의 현 상황 그 자체를 그린 만화가 아닐지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달리는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인질극 및 살육전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첫번째 빌런인 십이귀월의 하현1, 엔무는 잠과 꿈을 활용한 혈귀술로 탄지로 일행을 몰아붙인다.

잠으로 육체를 귀속한 채, 과거를 회상하는 달콤한 꿈을 통해 정신을 옭아매어 현실에 돌아올 수 없도록 만든다.

일본인들에게 달콤한 꿈이란, 버블경제 시기의 잘나가던 일본일 것이다.

1980년대, 도쿄 땅만 팔아도 미국 전체를 살 수 있었다는 말도 있었다. 

결국 파국을 향해 가는 것도 모른채, 순조롭게 앞을 향해 나아가던 무한열차는 그 시절 일본이겠다.

ⓒFinancial Times

그런 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은 엔무의 혈귀술에 홀려 달콤한 꿈, 즉 과거에 젖는다.

가장 먼저 꿈에서 깬 인물은 탄지로. 본인의 목을 베는 인고의 노력으로 파훼법을 찾는다.

 

대호황시기의 타성에 젖어 아직도 디플레이션, 내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을 타개하지 못한 일본인들에게 

탄지로의 목을 베는 자결 행위는 채찍과도 같은 울림이었을 것이다. 아니 울림이어야 한다.

엔무의 처절한 방해에도, 탄지로는 꿈을 깨기 위해 끝없는 자결을 해가며 과거로부터의 극복을 시도한다.'

탄지로와 이노스케는 결국 엔무를 제압한다.

 

반면 앞으로만 가던 열차는 어느덧 탈선하여 멈춰선다. 

앞으로만 나아갈 줄 알았던 일본도 과거의 그 위상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온전치 못한 몸 상태로 안도의 한숨을 쉬려던 찰나, 탄지로 일행 앞에 등장한 것은 십이귀월의 상현3, 아카자였다.

아카자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혈귀 고위간부로, 염주(炎柱) 렌고쿠와 차원이 다른 결전을 벌인다.

인간인 렌고쿠의 강함에 감탄한 아카자는, 그에게 혈귀가 될 것을 권유한다. 

다치지도, 죽지도, 약해지지도 않는 혈귀가 되어 끝없는 전투를 하며 지고의 경지에 오르자고 권유한다.

정의로 똘똘뭉친 우리의 렌고쿠가 단호하게 거절하기는 했지만,

아카자의 발전만능주의와 같은 이러한 권유를 들었을때 또다시 우리는 일본의 저돌적이던 1980년대를 떠올린다.

 

일본인들은 80년대만을 생각하겠지만, 그들의 확장성을 몸소 체험한 우리 한국인들은 더 깊은 역사로 들어가게 된다.

바로 1800년대다. 19세기 말, 일본의 제국주의는 팽창과 저돌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아카자의 기백과도 같은 발전만능주의는 결실을 맺기는 효율적이나, 떳떳하지 못했고 심지어 비겁하기까지 했다.

너무 강해도 부러지는 법이다. 도망치는 아카자처럼 일본도 결코 멋있지 않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이 영화는 그들의 과거가 빚어낸 결실을 찬양하는 동시에, 전범이자 종이호랑이가 된 현재의 모습을 비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루는 길지만 언젠가는 동이 튼다. 

잃어버린 20년이란 말을 모두가 알고 있다. 과거만을 바라보던, 그 길었던 하루를 이제는 숲속으로 내쫓아 보내고, 터오는 동을 마주하며 현재를 살아보려는 그들의 아우성이 이 작품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렌고쿠가 본인의 업을 끝마치고 후회없이 떠난 모습은 멋졌다.

혹시라도 현재의 경쟁적세계에서 도태되어버린 그들의 모습을 합리화하고자하는 욕심의 발로가 렌고쿠의 죽음으로 의미된 것은 아닐지, 혹여 그렇다면 너무나도 안쓰러운 조의를 일본인들에게 보내야 할 것이다. 

ⓒ네이버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