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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해외영화

[영화리뷰] <글루미 선데이> - 한 줌의 존엄성, 존재의 가치

 

줄거리

1999년의 어느 가을, 한 독일인 사업가가 헝가리의 작지만 고급스런 레스토랑을 찾는다. 추억이 깃든 시선으로 레스토랑을 둘러보던 그는 이윽고 한 곡을 신청한다.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자 돌연 그는 가슴을 쥐어 뜯으며 쓰러지고, 누군가 비명을 내지른다. "글루미 선데이! 그 저주의 노래야!"
 
 60년 전, 다정함과 자신감을 겸비한 남자 자보와 그의 연인 일로나가 운영하는 부다페스트의 작은 레스토랑. 새로 취직한 피아니스트 안드라스는 아름다운 일로나에게 첫 눈에 반해 자신이 작곡한 노래 ‘글루미 선데이’를 선물한다. 일로나의 마음도 안드라스를 향해 움직이자 차마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던 자보는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한편, ‘글루미 선데이’는 음반으로 발매돼 엄청난 인기를 얻지만 연이은 자살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스캔들에 휩싸인다. 설상가상 부다페스트는 나치에 점령당하고 일로나를 사랑한 또 한 명의 남자, 한스가 독일군 대령이 되어 다시 레스토랑을 찾아오는데…

<스포일러성 리뷰>

감성적인 여인, 그리고 예술가, 그리고 사업가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간의 관계, 또는 그들과 그들 밖의 관계. 

아무쪼록, 3명의 동시연애란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관계가 아닐 수 없다.

요즘의 나는 나 하나 감당하기도 벅차니까.

그래도 가능했던 이유는 자보의 말대로다. "사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다."

나를 채워주는 것과 나를 갈망하는 것.

그 두 가지는 상충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나를 충족시킬 수 있다.

마치 '채찍과 당근', 또는 '비교우위와 동기부여'와 같은 관계인 셈이다. 

자보는 다분히 논리적인 사업가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감성적인 인물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우리는 보통 감성과 논리를, 대립하는 각각의 요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보는 다르다. 왜냐하면 역설적이게도, 가장 논리적인 사람만이 가장 감성적일 수 있으니까.

능력주의가 아닌, '필요'주의의 컷 ㅋㅋ.

그 이유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언급을 참지 않을 수 없다.

진화론은 그 어떤 이론보다도 인간을 위한 이론이라고 생각된다. 신을 위한 이론이 아닌.

극의 초반, 자보가 한스를 보내는 열차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 "적자생존을 인간에게 적용해서는 안 돼요. 동물은 동물답게, 인간은 인간답게 사는 겁니다."

자보는 인간에게 다윈의 이론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가장 논리적인 반항아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서양에서 중세부터 내려오던 철학과 세계관을 단숨에 역전시킨 코페르니쿠스적 이론이 아니었던가.

창조설과 진화론의 대립. 그리고 그 창조설을 뒷받침하는 증거의 기저를 지켜온 것, 바로 인간의 '존엄성'.

물론 현대의 유대인들은 진화론을 주장하지만, 이 영화는 명명백백히 이론의 사실여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이 영화는 '인간의 존엄'에 관한 2시간짜리 영화다. 그리고 이를 너무 명백히 장례식 이후 다보의 대사를 통해 보여준다.

"이제야 <글루미 선데이>의 메시지를 알 것 같아.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존엄을 가진다는 걸 뜻하는 것 같아. 상처를 받고 모욕을 당해도 한 줌의 존엄으로 우리는 최대한 버틸 수 있어. 하지만 차라리 버틸 수 없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나아."

그래서일까. 작곡가 안드라스가 그런 결말을 선택한 이유가 납득된다.

안드라스의 자살은 두 가지의 일반적 이유로 이해된다. 

첫 번째는, 굴욕스러운 존엄성이다. 지켜오던 한 줌의 존엄마저 짓밟힌 순간, 세상은 버틸 수 없는 어떤 것이 되며, 그것은 더 이상 유지할 이유가 사라진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방에서 유유자적 옷을 추스르며 나오는 ('행세'를 했던) 남자의 시중을 드는 꼴이란. 아마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직접 적은 가사에서 말해주듯, 본인의 계획이다.

"천사들에게 내 자릴 남겨두라고 이야기해줘요. 어둠과 함께 곧 떠날게요. 눈물은 거둬요 내 짐은 가벼워요."

본인의 노래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에 이른다는 사실에, 이미 적지 않은 우울증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글루미 선데이>가 훌륭한 이유는 또 있다.

현실에서, 또 역사적으로 나치는 물론 타협할 수 없는 악당이지만,

영화에서 나치의 등장은 일차원적인 권선징악으로 충분히 귀결될 수 있는 단순한 소재다.

그 단순함을 성공적으로 극대화시킨 작품이 타란티노의 <바스타즈: 거친 녀석들>인 셈.

<글루미 선데이>는 그 단순화 알고리즘의 희생양이 될 뻔! 했다.

물론 나치는 평면적이었고, 악과 선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갈렸다.

하지만 음악과 분위기가 그 2시간을 감싸게 된다. 

마치 <냉정과 열정사이>처럼 말이다.

신기하게도 <글루미 선데이>의 자보와, <냉정과 열정사이>의 마빈은 비슷한 캐릭터다. 

냉정과 열정사이

일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 1968>의 올리비아 핫세처럼 대체 불가능이며, 

머로잔 에리커라는 한 사람이 없었다면 이 영화가 이 정도의 흡입력이 있었을까. 

평범할 수 있었던 줄거리였지만, 캐스팅과 분위기, 음악이 최고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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