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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해외영화

[영화리뷰] <마틴 에덴> - 열정을 좇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줄거리

오직 한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펜 하나로 세상과 맞선 남자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나폴리.
주먹 하나만큼은 최고인 선박 노동자 ‘마틴 에덴’은
상류층 여자 ‘엘레나’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오직 그녀처럼 생각하고 말하기 위해 굶주린 듯 탐독하고,
그는 들끓는 열정에 이끌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이 함께 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마틴 에덴’은 홀로 펜 하나로 세상과 맞서기 시작하는데…

<스포일러성 리뷰>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봉준호 감독이 선택한 영화 <마틴 에덴>.

언뜻 로맨스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영화다.

2시간 5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부족할 정도로 수다스럽다.

선상에 올라 자유롭게 여행하며 일하던 선원 마틴은, 부잣집 막내딸 엘레나에게 첫눈에 반한다. 

엘레나의 외모와 교양에 빠져든 마틴 에덴은 그녀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글쓰고 싶다며 처음으로 책을 편다.

보들뢰르의 시를 시작으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까지 영역을 넓혀나가며 열정적으로 탐독한다.

마치 스펜서의 「교육론」처럼, 그의 가난과 결핍은 스스로의 교육에 있어 큰 자극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후 마틴은 본인 안의 창작욕이 불타오른다며 작가를 꿈꾼다.

그리고 수년을 굶주린 작가로 살아가다가, 마침내 성공한다.

 

멋진 이야기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마틴 에덴>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노력한 끝에 보란듯 분야의 정상에 올라, 사랑과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는 남자의 뻔한 입지전적인 자서전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열정을 좇는다. 그리고 그 열정을 향해 나아가는 뒷모습은 아름답다.

마틴은 작가의 꿈이라는 개인적 열정을 좇는다. 그리고 각자의 열정을 좇는 개개인이 살아가는 세상을 추구한다.

사람마다의 열정은 있는 그대로, 그 자체가 아름답다.

그래서 <마틴 에덴>의 카메라도 이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처럼, 날 것 그대로의 분위기를 담는다. 

그런 점에서 마틴은 사회주의에 회의적이다. 그곳에는 개인의 열정을 위한 공간은 없으며, 오직 집단적 광기만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무시되는 사회는 결국 폐해만을 생산하고 재생산할 뿐이다.

하지만 자유주의도 반대한다. 탐욕스런 돼지들을 위해 수많은 굶주린 노예들이 희생되는 꼴은 볼 수 없다.

그래서 마틴은 약혼녀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위선적이고 오만한 부자, 편견에 사로잡힌 권위자를 욕한다.

자유주의자 판사가 지지해오던 Anti-trust 법안들이 사실은 사회주의 취지의 법안이라며 그 모순성을 비판한다.

가난을 모른채 고등교육을 받아온 부자들이, 선상에 쭈구려앉아 낡은 책으로 사회학을 접한 본인을 아주 하찮게 여기는 비참한 상황이었음에도 옆자리에 약혼녀가 있기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어느덧 부끄러이 여기는 그녀를 보며 마틴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약혼녀의 집을 떠나온다.  

그리고 배가 침몰한다.

배는 자유롭게, 열정을 가지고 살기를 희망하는 그의 열정이었다. 그것이 침몰한다.

그리고 페이즈는 넘어가며 마틴은 부자가 되어 나타난다.

마틴은 작가로서 사회주의에 타협하는 글을 쓰며 부자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가 그에게 막대한 부를 선사한다.

하지만 마틴의 눈이 퀭하다. 인생의 목표를 상실한 사람처럼, 그가 보던 사회주의 노동자집단의 광기어린 잡배들처럼.

지금껏 마틴을 주조해오던 열정은 더이상 마틴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고민하며 사회의 이면,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던 그의 문학은 이제 없다.

그것에 대한 열정은, 마틴이 시대와 타협하고 주류에 편승함과 동시에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비록 교육의 수준은 따라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엘레나에게 사회적 클래스의 격차로 인해 버림받은 모습처럼, 마틴 역시 자본가로 거듭나자 같이 살아온 아내를 떠나보낸다. 마치, 그의 말처럼 "개를 버리듯" 말이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가장 혐오하는 '노예'를 집안에 들이는 것처럼 아주 쉽게, 또 다른 여자를 그의 품에 안는다.

이후 영화의 막바지, 인간 존엄을 짓밟은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초점이 돌아온 마틴이 해변에 앉아있다.

이탈리아의 사회주의는 그 의미가 변질되고, 결국 파시즘이라는 제국주의로 막을 내렸다.

그가 열창하던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되려 제국주의의 태동을 이끌었다.

이제 그가 사회주의를 등에 업고 돈을 벌던 시대도 막을 내릴 것임을 우리는 안다.

 

"젊은이, 어떻게 할거요?"라고 묻는 말에 마틴은 바다를 바라본다.

그리고 카메라는 과거 본인만의 열정과 자유를 좇던 남자의 뒷모습을 비춘다.

남녀의 사랑, 작가의 창작욕, 그리고 자본계급, 사회주의, 자유주의

처음에는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궁금했다.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놓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다른 요소를 어떻게 완벽히 버무릴 수 있는지의 해답은 <마틴 에덴>이다.

<마틴 에덴>은 로맨스의 극적인 요소와 네오리얼리즘의 다큐적인 요소를 적절히 배합하고, 이를 통해 자유로운 개인이 좇는 열정의 진가를 적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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