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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해외영화

[영화리뷰] <부력> - 정의란 무엇인가?

줄거리

“여긴 죽음의 바다야.”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14살 소년 ‘차크라’.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태국으로 떠났지만
 도착한 곳은 바다 한 가운데였다.
 
 하루 22시간 노동에 시달려도 받는 돈은 없고,
 허기를 채울 만한 건 한 줌의 찬밥과 더러운 물뿐이다.
 
 끔찍한 학대가 일상이 되어버린 이곳,
 그 어디에도 소년을 도와줄 사람은 없다.

<스포일러성 리뷰>

호주 감독 로드 라스젠의 장편 데뷔작.

 

CGV 명동씨네라이브러리에서 진행된 정성일 평론가와의 라이브러리 톡으로 관람하였다. 

 

이야기 구조상으로 <부력>은 동남아시아 어업시장에서의 인권착취, 인신매매를 다룬다.

 

하지만 이야기를 더 깊게 들어가면 무엇인가 다르다.

 

"사회구조가 빚어낸 피해자가 저지른 범죄는 사회구조의 책임인가, 아니면 피해자 개인의 잘못인가"를 두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라스젠 감독의 의도가 <부력>의 이야기를 거치며 나타난다. 

 

그 시작에는 열네살 소년 차크라의 성장담이 자리잡고 있다.

정성일 평론가는 성장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성장담은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있다. 보통 내면적 성숙의 과정을 그린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장을 이야기할 때 좋은 방향의 성장만을 떠올린다. 헤르만 헤세만 떠올리는 셈이다. 그런데 성장에는 나쁜 성장도 있다."

차크라의 성장은 폭력에 감염되는 과정이다. 이것은 곧 <부력>에서 로드 라스젠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수 차례의 살인이 일어난다.

 

그 중 차크라가 직접 저지른 살인도 있다. 이 점에서 명백히 차크라는 살인범이다.

 

모든 상황적 측면을 차치하고 법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살인범은, 살인이라는 죄는 옹호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차크라가 처한 비참한 현실적 상황을 고려한다. 그의 선택에 누가 비난할 수 있는가?

 

그런데, <부력>은 그 상황의 주관적 온도를 모두 빼놓은 채 찍는다. <부력>이 훌륭한 영화라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차크라는 어떠한 감정적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대사마저 몇 줄 읊조리는 것이 전부다.

 

<부력>의 카메라는 차크라의 내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 소년의 살인행위를 결코 옹호하지도 않는다. 이 소년의 살인행위를 비난하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정당방위의 폭력이 가져다주는 통쾌함, 즉 카타르시스를 찍는 영화가 아니다.

 

또, 단순한 인권문제가 있다는 인권고발영화라고 치부하기에는 성급한 단순화일 것이다.

악순환이 구조화되었을 때, 개인의 노력으로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부력>의 인신매매는 악순환의 구조화를 보여준다.

 

선장도 차크라와 같은 열댓살 아이일 때 배에 오른 인신매매 피해자자인 것처럼 말이다. 물색, 알선, 운반, 매매, 감금과 폭행으로 이어지는 인신매매의 구조는 조직화 되어있으며, 국가 또는 제도적 시스템은 그 피해자들을 결코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차크라처럼 폭력을 통해 고리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발터 벤야민이 말하기를, 객관적 폭력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리는 모두에게 주어져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권리의 행사가 무제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그 권리의 행사를 제한한다면 무엇을 토대로 제한할 것인가?

<부력>은 이 모든 문제를 '심판'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에게 넘긴다. 마치 시민재판처럼 말이다.

 

우리 시민재판원들은 차크라의 살인을 두고, 정의의 구현이 아닌 '살인' 그 자체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부력>은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정의를 주장하지 않는다. 드라마를 만들지 않는다.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의 관계는 꼭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보아서는 안된다. 

 

선장과 그 무리는 배 안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 착취자다. 당연히 차크라는 피착취자가 된다.

 

하지만 거대한 어업시장 전체를 두고 보면, 선장과 그 무리도 차크라처럼 배에 갇힌 피착취자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마저 착취하는 자는 누구인가?

 

바로 빈곤이다. 시장논리가 만든 빈곤이 이들을 착취한다. 그리고 그 빈곤함은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채 방치되는 중이다.

 

 

새우잡이 배의 선장이 가지는 절대적 권력이라고 해봤자, 크게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은 피착취자가 먹는 음식과 비슷한 수준의 음식을 먹고, 비슷한 곳에서 자고 깰 것이다.

 

그들의 침실이라고 해보았자 럭셔리한 호텔도 아니다.

 

식사라고 해봤자 일꾼들에 비해 조금 나을 뿐, 고급뷔페를 먹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악랄하고 처절한 짓을 통해 벌어들인 돈이라고 해야 양철통에 들어간 지폐다발 두 뭉치가 전부다.

 

고작 그 정도의 돈을 벌자고 그들도 시장논리에 따라 착취되는 인생을 살아간다. 그들이 스스로 이를 의식하든 하지못하든 말이다.

 

그들은 똑같이 배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똑같이 배 밖의 인생을 살 수 없는 '구조적 피착취자'들에 불과하다.

과연 우리는 차크라의 살인을 정의라고 위안삼을 수 있을까?

 

당연히, 선장 무리의 잘못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것만을 논하는 영화라면 <부력>은 결코 좋은 영화의 타이틀을 거머쥘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뒤틀린 폭력에 대한 정의가 우리에게 잘못된 희열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배불리 먹여주고 있잖아." 차크라의 아빠가 허물어져가는 집에서 7남매와 식사하는 도중, 불평하던 차크라에게 건넨 말이다. 

 

"배불리 먹여주고 있잖아." 차크라의 선장이 허물어져가는 배에서 차크라에게 건네는 말과 일치한다.

 

선장은 차크라에게는 또 다른 아버지다. 그리고 위의 두 아버지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처럼, 아들의 인생에서 아들이 성장하기 위해 죽어야만 했다.

 

차크라가 아버지를 두 명이나 가지게 된 것처럼 보이는 까닭의 원인에는, 차크라가 마주한 두 가지의 중첩된 빈곤이 있다.

 

 

가정의 빈곤은 차크라를 만들어냈다.

 

빈곤한 농부는 자식 한 명 한 명이 일꾼이기에, 자식을 낳지 않고는 필요한 인력을 충당할 돈과 방법이 없기에, 차크라의 7남매를 낳았다. 차크라를 낳은 원인은 빈곤이며, 차크라를 기른 것도 빈곤이고, 차크라가 가정을 떠나게 만든 원인도 빈곤이다.

 

국가의 빈곤은 차크라를 떠나보냈다. 빈곤한 국가는 국민에게 그 어떠한 개런티도 주지 못한다. 풍요로운 국가의 빈곤한 가정은 국가 내에서 일자리를 모색하거나 기회를 찾는다.

 

반면, 빈곤한 국가의 빈곤한 가정은 국가 내의 인프라를 이용할 수 없다. 국가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60년대 한국의 간호사와 광부들이 서독으로 떠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두 가지 빈곤은 차크라로 하여금 두 번이나 집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두 번의 가출 사이의 사건과 경험은 차크라를 '성장'시켰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하지만 집을 떠난다고 빈곤의 족쇄가 끊어진다는 보장이 있을까.

 

<부력>에서 드론을 사용하여 촬영한 숏은 그 주제를 드러낸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새우잡이 배를 찍으며 카메라는 마치 새처럼 날아간다. 

 

이 숏은 외로이 고립된 이미지를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배에 탄 그들이 자유롭게 어디론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배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빈곤의 족쇄를 떠날 수 없는 현실도 함께 보여주는 숏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무리 배 안에서 절대적 권력을 누리는 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살인은 차크라에게 학습된다.

 

첫 번째 살인 (병든 선원을 밀어죽임) 이후 선장은 죽은 자의 겉옷을 차크라에게 건네주며, 감정적으로 살인을 견딜 수 있도록 학습시킨다.

 

두 번째 살인 (탈출을 시도한 선원을 쇠사슬에 묶어 밀어죽임) 이후 차크라는 절대적인 권력에 복종하는 것은 물론, 구애를 하다시피 점수를 따려는 행동을 보인다. 살인마저 할 수 있게 만드는 '권력'의 개념을 학습한다.

특히 그물에 걸려온 게를 살려주는 장면은, 피착취자의 생명을 좌우하는 절대적 권력을 행사해보는 차크라를 보여주는 훌륭한 연출이다.

세 번째 살인 (형의 거열형) 때는 곧 벌어질 살인에 대한 부정도, 반항도, 거리낌도 없이 그저 지켜본다. 그러다가 선장이 차크라의 손을 빌려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엄밀히 따지면 차크라는 이때 첫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가 된다. 

 

네 번째 살인부터는 차크라가 본인의 의지를 가지고 직접 저지르기 시작한다. 몽둥이로 때려 마음에 들지 않는 동료선원을 바다에 밀어넣어 죽인다. 이것은 변호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살인행위다. 

 

 

네 번째 살인을 저지른 다음 날 아침, 차크라는 살인을 인정하고 나선다.

 

'살인'의 행위는 갑판 위에서 절대적 권력의 행사로 여겨지며, 선장과 그 무리들만이 할 수 있던 행위다. 차크라가 어젯밤에 저지른 살인은 월권이며 선장 본인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선장은 본인만의 권위를 재조명하고 재확립하기 위한 표현으로 차크라의 이마에 총을 겨누지만 차크라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차크라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선장은 본인의 손으로 '직접' 피를 묻혀가며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깜냥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까지 파악한 것이다. 

선장은 이후, 살인을 저질렀으니 본인에게서 죽을 때까지 못 벗어난다고 차크라에게 속삭인다.

 

이때 차크라는 이 문장을 "선장을 죽이면 벗어나게 되겠구나"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본인이 앞으로 죽여야 할 세 명의 무리를 바라본다. 그 눈길은 선장이 먼저 피할 정도다.

 

 

그날 밤, 차크라는 엔진실에서의 살인을 시작으로 다음날까지 총 세 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특히 계기판 앞에서 항해사의 머리를 뼈로 열네번 내리쳐 죽이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잡는 카메라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다.

 

항해사가 차크라를 특별히 괴롭히거나 폭행한 장면도 없고, 차크라의 살인 장면이 통쾌함이나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는다.

차크라는 앞으로 선장과 같은 인간 내지는 선장보다 더 사악한 인간으로 성장할 것이다. 

 

차크라와 같은 피해자가 동남아시아 어업시장에 20만명 가까이 있다고 한다. 그 과정을 겪고 자란 아이들이 과연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 것인가. 

 

착취자와 피착취자간의 폭력의 감염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부력>은 단순히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에 빠지지 않는다.

 

관객들로 하여금 착취자로부터 폭력을 답습한 피착취자가 만들어갈 미래는 어떠할 것이며, 그 악순환적 고리의 확대재생산은 무슨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비참한 현실에서 더 비참해지지 않기위해 비참한 짓을 벌이는 자들에게, 비교적 축복받은 우리가 안락한 소파에 누워 정의를 논한답시고 그들에게 겨누는 칼날이 향하는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가? 

 

영화가 깊이 통렬하다.  가버나움의 매운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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