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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국내영화

[영화리뷰]<자산어보> - 수묵화의 묵직함, 어탕의 담백함

줄거리

이 양반은 대역 죄인이니 너무 잘해줄 생각들 말어”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
 호기심 많은 '정약전'은 그 곳에서 바다 생물에 매료되어 책을 쓰기로 한다.
 이에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청년 어부 ‘창대’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창대’는 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창대’가 혼자 글 공부를 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거래라는 말에 ‘창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다.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점차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간다.
 
 "너 공부해서 출세하고 싶지?"
 그러던 중 '창대'가 출세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약전'은 크게 실망한다.
 ‘창대’ 역시 '정약전'과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정약전'의 곁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결심하는데...

<스포일러성 리뷰>

사극 장인 이준익 감독이 <자산어보>를 들고 돌아왔다.

어류학서인 [자산어보]의 서론*을 바탕으로, 정약전이 저서를 집필할 때 옆에서 도운 창대라는 인물과의 일을 상상하여 영화로 옮겨내었다.

이준익 감독이 <동주>에 이어 다시 한 번 흑백영화로 촬영한 <자산어보>는 조선 후기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생활간 있었던 일을 수묵화처럼 묵묵히 그린다. 

경세치용(經世致用)학파로 알려진 정약전과 정약용은 현재 천주교로 자리잡은 서학(西學)의 신자라는 이유로 박해를 당해 귀양살이를 하였다 (신유박해). 박해 과정에서 형제 정약종은 순교하였다.

정약용은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두 형제는 십수년의 유배 생활동안 저서를 여러권 남겼다.

이 영화는 저서들 중 정약전의 [자산어보]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대조하여 투트랙의 진행을 꾀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형제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좇는 실학자들이었음은 잘 알려져있다.

실제로는 공통점이 더 많은 형제이나, 영화 <자산어보>는 두 형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다소 대비적으로 보여준다.

 

동생 정약용은 당대 실정의 사태를 꼬집으며 위정자가 백성을 다스리는 옳은 방법을 [목민심서]를 통해 제시한다. 

행정가로서 정조의 국정을 곁에서 서포트하였고, 학자로서 성리학의 대가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은 정약용은 이 영화에서 어쩔 수 없는 위정자의 위치를 점한다.

한편, 형 정약전은 백성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어류도감을 편찬한다.

약전에게 세상은 통치자와 피통치자로 구성된 이분적인 세계관이 아니다.

지구의 땅과 바다가 둥글게 이어져있고, 달과 태양이 지구와 (줄도 없는데) 연결되어있듯, 세상 만백성은 연결되어 있을 뿐, 위아래로 구분되지 않는다.

극 중 창대를 향해 "물고기를 잘 알지만 시를 못짓는 너나, 시를 짓지만 물고기를 모르는 나나 다를 것 없다"는 약전의 대사에 그 의미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시대를 너무 앞서간 사람에게는 헤게모니의 응징이 있어왔다.

빌라도와 유대인은 예수를 죽였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단행위로 심판을 받았으며, 조광조는 기묘사화의 희생양이 되었다. 

 

수묵화처럼 묵직하고도 어탕국물처럼 담백하게 하고픈 말을 전하는 영화 <자산어보>.

우리가 오늘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내일의 진일보를 애써 외면하려 할 때 꺼내보아야 할 영화다.

*[자산어보]의 서론
“흑산도 해중에는 어족이 극히 많으나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적어 박물자()가 마땅히 살펴야 할 바이다. 내가 섬사람들을 널리 심방하였다. 어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말을 하기 때문에 이를 좇을 수가 없었다. 섬 안에 장덕순(, 일명 )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두문사객()하고 고서를 탐독하나 집안이 가난하여 서적이 많지 않은 탓으로 식견이 넓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차분하고 정밀하여 초목과 조어()를 이목에 접하는 대로 모두 세찰()하고 침사()하여 그 성리()를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그를 맞아들여 연구하고 서차()를 강구하여 책을 완성하였는데, 이름지어 『자산어보』라고 하였다. 

<자산어보>의 또 다른 관람 포인트

*남성중심적인 학문인 성리학을 오히려 페미니즘의 논거로 사용하며 영화가 품었어야만 했던 조선의 시대적 불합리함을 일정부분 해소하는 지혜. 

*당대 손에 꼽히는 학자로 높은 벼슬까지 지낸 정약전이, 대학(大學)의 첫소절에서부터 해석을 못해 답답해하는 창대의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가르쳐주는 장면이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

*원래 흑산도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보이는 이정은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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